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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도서의 책소개, 저자소개, 글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도서의 책소개를 할 텐데 일제 강점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신문에 연재로 발표한 이 소설은 <하융>이라는 이름의 삽화가가 함께했다. <하융>은 바로 박태원의 예술적 친우였던 작가 이상이었다. 당시 문화, 예술의 첨단에 서 있던 두 모던 보이의 친분은 잘 알려져 있으며, 순문학적인 목적을 갖고 결성된 구인회에 함께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도서의 책소개 

살면서 꼭 읽어야 하는 문학을 소개하는 <소전서가>에서 구인회 결성 90주년 기념이자 전시 《구보(仇甫)의 구보(九步)》의 일환으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새롭게 펴낸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한국 문학사에서 형식과 두드러지는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여전히 회자되며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이상이 삽화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최초로 연재 당시 같이 선보였던 이상의 삽화 29점을 수록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나란히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모더니스트의 글과 그림이 만날 때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한층 새롭게 다가갈 것이다. 박태원과 이상을 연구해 온 연구자 유승환, 김미영 교수와 함께 한 대담은 두 작가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2021년 독일 북아트 재단과 라이프치히 도서전이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최고 상 골든 레터를 수상한 디자이너 그룹 신신은 감각적이고 텍스트에 충실한 디자인으로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소전문화재단은 독서를 장려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함과 동시에 새로운 고전의 탄생을 기다리며 장편 소설 작가들을 후원하고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자생하고 계속하여 저변을 넓혀 가길 바라는 취지를 담아 과거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발전시켰던 당시의 젊은 두 소설가 박태원과 이상의 협업인 이 책을 다시 조명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삽화를 이상이 맡았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화가를 꿈꿨던 이상은 당시 서양의 예술사적 흐름에도 눈이 밝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경향은 큐비즘과 콜라주 형식을 연상시키는 삽화들에서 드러난다. 당시 경성의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처음 보는 형식의 시도들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소설들과 다르게 뚜렷한 서사 없이 경성을 방황하는 것을 받아 적은 듯한 박태원의 소설 형식은 이상의 삽화를 통과하며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들이 생각한 예술관은 이 작품을 통해 이어지고 완성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 당시 조선에서 빛나기 시작한 모더니즘의 시작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목적 없는 걸음으로 그려낸 1930년대의 경성. 그의 일 있는 듯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어진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해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 군데라 그가 갈 곳은 없었다. 박태원의 이름에 붙는 호는 <구보>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을 등장시켰으므로, 훗날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메타픽션의 성격을 가진 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제목이 보여 주는 그대로의 내용과 형식을 담는다.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한 26세의 구보 씨. 그가 하루 동안 경성을 누비며 보고 겪은 것들을 써 내려간다.

 저자 박태원 소개

모험을 마다하지 않은 모더니스트, 경성의 모던 보이 구보 박태원.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일본 호세이대학 법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짧았지만 일본 유학은 그의 예술적 경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21세 『신생』 10월 호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순문학적 목표로 결성된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이상 등의 구인회에서 문학적, 예술적 교류를 활발히 했다. 이후 1934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신문에 연재, 1936년 소설 「천변풍경」을 발표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경성의 세태를 문학에 담아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월북했다. 1962년 대하 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986년 『갑오농민전쟁』 등을 집필하였다. 1986년 북한에서 병으로 타계했다. 월북을 이유로 분단 이후 그의 작품은 금기시되었으나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와 함께 다시 국내 문단과 독자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근작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전집 A 세트 - 전 12권>,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전집 C 세트>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언제나 우리를 앞질러 나가는 작가.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화가를 지망하였으나 경성 고등 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세부터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서 건축 기사로 일했다. 1930년 잡지 『조선』에 장편 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1931년 건축 잡지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 등 20여 편을 발표한다. 이후 직접 다방 <제비>를 운영하며 구인회 구성원이었던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류하며 친목을 쌓았고, 1934년 정식으로 구인회 멤버가 된다. 같은 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삽화가로 참여하는 동시에 「오감도」를 연재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거센 반발을 받아 연재가 중단되었는데, 그럼에도 문단에서는 새로운 형식적 실험으로서 높이 평가했다. 1936년 변동림과 결혼 후, 요양을 목적으로 홀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듬해 <불령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 및 구금되었고, 폐결핵을 앓던 그의 병세가 악화된다. 결국 1937년 도쿄 제국 대학 부속 병원에서 2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글귀

한낮의 거리 위에서 구보는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잠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 쇠약에 틀림없었다.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 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구보는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기는 어디 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발 가는 대로, 그는 어느 틈엔가 안전지대에 가 서서,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의 단장과 또한 손의 공책과 물론 구보는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일찍이 그는 고독을 사랑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고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심경의 바른 표현이 못 될 게다. 그는 결코 고독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도리어 그는 그것을 그지없이 무서워하였는지도 모른다. 오후 두 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모데로 노로지오>를 게을리하기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함께 구보는 격렬한 두통을 느끼며, 이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피로를 전신에 깨닫는다. 구보는 얼마 동안을 망연히 그곳, 한길 위에 서 있었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그들은, 그러나 물론 그런 것을 그네 자신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세상살이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라 하나 인생에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무지는 거의 완전히 그 불안에서 그들의 눈을 가려 준다.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내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좋은 소설을 쓰시오.」 벗은 진정으로 말하고,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읽기 어렵다고 학생들이 투덜대면, 〈네가 하루 동안 서울 시내를 걸어 다녀 본 것을 소설로 쓸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해 보거든요. 그런 걸 소설로 만든다는 것은 어떤 걸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리고 너는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한번 더 생각해 보며 읽는다면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나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34년 8월의 「조선중앙일보」 문예면은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감도」가 실려 있고, 「소설가 구보 씨 일일」 이 같이 연재되었고, 또 그 삽화를 이상이 그립니다. 그 뒤에서 문예면을 책임졌던 사람은 상허 이태준이었습니다. 모두 구인회에 같이 적을 두었던 사람들이죠. 즉 한국의 1930년대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1934년 8월 「조선중앙일보」 문예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