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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수업 도서의 책소개, 저자소개, 찬사

명상록 수업

명상록 수업 도서의 책소개를 할 텐데 『명상록』은 시간을 건너 살아남은 책이다. 이 사실은 『명상록』의 불멸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명상록』은 시간에 매인 책이다. 이 사실은 『명상록』의 한계를 보여준다. 시간 안에서 시간을 건넌 방법, 한계 안에서 불멸로 살아남은 방법을, 피에르 아도의 『명상록 수업』은 깊이 있게 탐구한다. 스토아철학을 설파하는 현대의 많은 책이 자기 계발을 위한 해석으로 쏠려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명상록 수업』은 『명상록』이 어떻게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 영감이 되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 될 것이다.

 명상록 수업 도서의 책소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쓰면서 자기 안에 혼란스러운 정념이 미치지 못할 성채를 쌓았다. 하지만 평온이 지배하는 이 ‘내면의 성채’는 철학자-황제가 초월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처박히는 상아탑이 아니라, 시야가 넓게 펼쳐지는  높은 곳인 동시에 멀리 보고 정확히 행동하기 위한 작전기지였다. 달리 말하자면, 『명상록』은 평정심을 찾아 행동하는 한 인간의 자기 수련을 위한 책이다. 그에게 평정심은 사리 판단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고 인간 행동은 우주와 인류 공동체라는 전체 안에서 바라볼 때만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상록』에서 아우렐리우스는 세 가지 근본 규율을 실천하기에 힘쓴다. 정념으로 말미암은 편견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자연의 보편적인 흐름에서 비롯한 사건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기. 하지만 저자 피에르 아도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은 스토아철학 자체, 정확히는 당대 스토아철학의 거인 에픽테토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여주었던 스토아철학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명상록』은 그렇기에 스토아철학의 근본 삼원 도식으로 서술되고 있고, 따라서 스토아철학을 향한 1차 관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명상록』은 스토아철학의 명저이자 2천 년이 지난 현대에도 빛을 잃지 않는 지혜의 원천이기에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읽히는 텍스트이지만, 서술 방식이나 문장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자 할 때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작품의 철학적이고도 역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피에르 아도의 『명상록 수업』이 탁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토아철학적인 삶은 주로 내적 담론을 다스리는 데 있다. 개인의 삶에서 모든 것은 상황을 생각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한 우리의 내적 담론이다. 정신적, 정서적 강렬함은 금세 지나간다. 이것을 다시 일깨우려면 이미 쓰여 있는 것을 다시 읽어보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 글이 쓰여 있는 페이지는 이미 죽은 것이다. 『명상록』은 다시 읽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쓰는 것, 쓰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곧바로 글을 쓰고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행위다. 또한 공들여 구성을 짜고, 쓰고 나면 당장 효과가 스러질지라도 가장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물리적 구현 매체에 쓴 문자는 그 무엇도 붙잡아놓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있다.

 저자 피에르 아도 소개

서양 고대철학 연구의 거장으로 특히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에 관한 정통한 연구로 알려져 있다. 1922년 프랑스 랭스에서 태어난 그는 1944년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나, 가톨릭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경계하는 교황 비오 12세의 1950년 칙서 「후마니 제네리스Humani generis」가 발표된 후로 가톨릭 사제직을 그만둔다. 1961년부터 20년간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1982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서양 고대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다 1991년부터는 명예교수로서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 연구에 몸담았다. 프랑스에 처음으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소개한 이들 중 하나로 알려진 아도는, ‘정신적 수련’으로서의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분석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며 이는 미셸 푸코가 『성의 역사』를 집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가 자기 자신은 물론 현대인들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제공할 것이라 믿으며 일평생 고대철학 연구에 매진하다 2010년 사망했다. 최근작 : <명상록 수업>,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플로티노스, 또는 시선의 단순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종교였다. 고도의 도덕적 양심으로 우주 앞에 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렇다. 이 절대적 종교는 어느 족속, 어느 국가의 것이 아니다. 어떤 혁명, 진보, 발견으로도 그 종교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앞에서만 가장 내밀한 것을 성찰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대신 타자에게 말하거나 구술할 때는 내적 담론이 진부하고 몰인격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찬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쓰면서 스토아주의 정신 수련을 했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글쓰기라는 하나의 기술, 하나의 방법을 썼다. 내적 담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스토아주의의 도그마와 삶의 규칙을 명상한 것이다. 그날그날의 글쓰기 수련은 언제나 새롭게 다시 해야 한다. 진정한 철학자는 아직 자신이 진정한 지혜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는 특히 시간을 대하는 태도, 현재에 대한 집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그로써 지금 이 순간의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이해하고 고통 또한 현재에만 경험하는 것, 느끼는 것이라는 자각을 통해 그 극심한 아픔을 완화할 수 있다. 현자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인류는 어리석다. 사람들 사이에는 이성의 부패와 일탈이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스토아주의자는 사람들에게 철학을 하라고, 지혜를 수련하라고 권한다. 요컨대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행사하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다. 운명과 사건의 거대한 흐름 한가운데 탈취할 수 없는 자율의 섬이 있다. 우리에게 달린 것은 우리 영혼의 행위다. 그 행위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니까. 어떤 것을 판단하느냐 마느냐,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 무엇을 욕망하느냐 마느냐, 어떤 것을 원하느냐 아니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 사물이 넘어올 수 없는 경계, 침범할 수 없는 자유의 요새, 그것을 나는 ‘내면의 성채’라고 부를 것이다. 사물은 이 성채 안으로 파고들 수 없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전개하는 담론, 우리가 세계와 사건에 부여하는 해석을 만들지 못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 밖에 있는 사물은 “가만히 머물러 있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그것에 다가간다”라고 말한다.  ‘무섭다’ ‘두렵다’ ‘위험하다’ ‘가증스럽다’ ‘혐오스럽다’ 같은 술어를 제거하면 자연현상과 세상사가 벌거벗은 채로 드러난다. 그다음에는 모든 실재가 보편 자연의 관점에서 야성의 아름다움으로 지각된다. 영원한 변모의 흐름 속에서는 우리 개인의 삶과 죽음도 지극히 작은 물결에 지나지 않듯이. 우리는 으레 사물을 보던 방식을 바꾸는 행위에 힘입어 그렇게 바꿀 수 있는 우리의 힘을 깨닫는다. 육신을 지녔다는 점에서,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굶주릴 수 있고 어느 날 죽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는 운명의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해 나는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런 것이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자유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한낱 음표의 연속, 움직임의 연속으로 환원될 수 있는 노래나 춤 때문에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되듯이 인생 전체를 그려보고서, 우리를 기다리는 고난과 시련을 상상하고서 실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인생도 구성단위로 쪼갤 수 있는 춤이나 노래와 마찬가지며, 그 단위의 합일뿐이다. 단위 하나하나를 연달아 잘 해내면 춤이 되고 노래가 된다. 인생도 그와 같아서 우리는 순간순간을 연달아 산다. 그리고 그 순간을 쪼개고 한정할수록 우리는 좀 더 자제력을 잘 발휘할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 일상은 진부한 것, 판에 박힌 것일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행동도 아무렇게나 부주의하게 할 수 없다. 자기를 표현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행동에 온전히 임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더는 기다릴 수도 없고 미룰 수도 없다. 순수한 의도에서 “온 영혼을 바쳐” 행동할 수밖에 없다. 과학은 신과 영혼을 파괴할 수 있었으나 『명상록』은 그 생명력과 진실로 인하여 여전히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