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도서의 책소개, 저자소개, 비평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도서의 책소개를 할 텐데 가장 취약한 자리를 중심으로 인간다움을 다시 세우고, 세계를 다시 짓는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삶이 가능할까. 구조적 부정의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내며 살아온 장애 당사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가 비장애중심적 세계를 향한 묵직한 질문이자 전복이다. 변방의 시좌는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의 틈새에서 삶의 자리를 벌이며 차별과 혐오, 고립 속에 놓인 모두를 위한 윤리를 향해 도약한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도서의 책소개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장애, 상호교차성, 삶과 정의에 관한 최전선의 이야기들》은 미국의 장애인권 활동가‧작가이자 중증장애인인 앨리스 웡이 미 장애인법(ADA) 제정 30주년을 맞아 출간한 장애 당사자들의 에세이 선집이다. 앨리스 웡은 당사자의 힘으로 장애인권과 차별 철폐를 법제화해 온 장애운동의 의의를 기리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장애인들의 삶을 아카이빙 하는 ‘장애 가시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 결과로 엮인 이 책은 2020년 미국 출간 당시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 여러 매체에서 “미래를 향해 장애를 다시 이해하기 위한 최전선의 이야기들”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다양한 장애 유형은 물론 다양한 인종‧계급‧젠더적 정체성을 가진 저자들이 쓴 에세이의 의미는 묻혀 있던 장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복합적인 소수자성을 직시함으로써 “변방의 시좌”(김도현, 《장애학의 도전》)를 넓게 펼치며, 삶에서 길어 올린 구체적 언어로 자신을 ‘장애 화한’ 사회의 실패를 비춘다. 보조 테크놀로지를 장착하고 ‘사이보그’로 호명되는 것은 장애 당사자에게 어떤 경험일까.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는 상호 돌봄을 통해 창작된 장애예술은 어떻게 다를까. 장애인의 삶의 속도에 맞춰 재정의된 시간성인 ‘크립 타임’이 회복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장애가 “기예(art)이며 독창적인 삶의 방식”(장예예술가 닐 마커스) 임을 생생히 증언하는 이야기들은 결국 가장 취약한 자리를 중심으로 인간성과 윤리를 다시 성찰할 때 모두에게 가능한 삶을 가리키는 ‘장애 정의(Disability Justice)’의 정치적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저자 앨리스 윙 소개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장애인권 활동가이자 작가‧미디어 창작자다. 온라인상으로 장애문화 콘텐츠를 제작 및 아카이빙하는 ‘장애 가시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프로젝트의 이름을 딴 팟캐스트를 제작‧진행했으며,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전미장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담은 《급진적으로 존재하기(Disability Visibility : First-Person Stories from the Twenty-First Century)》를 기획‧편집했으며 활동가로서의 생애를 담은 《호랑이의 해(Year of the Tiger: An Activist’s Life)》를 썼다. 장애인은 ‘장애’라는 단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언어는 역동적이며 장애의 의미도 다양합니다. 올바르거나 우월한 단 하나의 정의는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장애인들은 여전히 침묵을 강요당하고, 숨겨져 있고, 낙인찍혀 있으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습니다. 장애인이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존재하며, 그것이 정의롭고 정치적인 사회 변화를 꾀하는 모든 운동이 ‘장애 가시화’의 과제를 포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 역시 미국에서 적절한 공공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분투해 온 사람으로서, 한국 정부의 굴욕적인 장애등급제를 바꾸고자 투쟁해 온 한국 장애인들에게 연대감을 느낍니다. 2022년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서울 지하철역에서 출퇴근 시간대에 지하철 탑승 시위를 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비장애중심주의와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장애인은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최근작 :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비평

비장애중심적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나도 이 행성에서 살아온 반백 년간 많은 일을 해내야 했다. 나는 책, 영화, 텔레비전에서 나와 닮은 사람의 이미지를 거의 못 보고 자랐다. 그런 부재 속에 놓인 사람은 뭔가가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될까? 2019년에 휠체어를 탄 어린 소녀가 상점 밖에 붙은 화장품 광고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광고 속 여성도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결국 실제로 만났다. 이 이야기는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했다. 당시 내가 나와 비슷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당당한 성인을 봤다면 내 세계관은 달라졌을까? 나이가 든 후, 장애인 커뮤니티를 찾아내고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점점 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싱어는 나같이 철저한 무신론자가 어떻게 자신의 완전히 합리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동시에, 나는 그의 이론들을 파헤쳐 보려고 노력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확신하게 하는 것일까. 중증장애가 있는 아기를 죽이는 선택을 하는 게 부모에게는 최선이라고 말이다. 영아는 살 권리를 가진 ‘인격체’가 아닌데도, 장애가 아닌 다른 특성을 가진 아기와 관련해서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생물학적 부모들과 입양 부모들 모두 건강한 아기를 선호한다는 것이 그 확신의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시장 자체가 편견으로 구조화된 상황에서, 이 시장을 감안해 생사를 건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문제라고 여긴다. 나는 가설 비교를 제안한다. “부모의 인종이 다른(mixed-race) 아기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특히 완전히 비백인이면 장애가 있는 아기만큼이나 입양이 잘 되지 않을 텐데요?” 싱어는 그런 경우 (영아살해를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동의한다. “아기들이 백인이 아니어서 입양이 안 된다는 이유로 죽임 당한다면 끔찍하겠네요.” 그럼 무엇이 차이점인가? 인종에 기반한 선호는 비합리적인데, 장애에 기반한 선호는 합리적인 이유는? 싱어의 논리에 따르면 이유는 단순하다. 장애라는 특성이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질이 낮다고?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화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장애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경우, 장애 자체가 그 자신을 형성한다. 후천적으로 장애가 생긴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한다. 우리는 장애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한 제약들을 감수하며 그 안에서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일궈왔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은 물론, 우리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한다. 우리는 세상에 필요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내가 만약 싱어가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궁극적인 악으로, 그를 괴물로 정의한다면, 장애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질이 낮다거나 특정한 의식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정의해 버리면 거리에서 만나고, 함께 일하고, 빵을 나누고, 서로 이야기하고, 지역 정치의 고단한 일들로 얽혀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괴물’이 될 것이다. 내 가족과 비장애인 친구들, 나에게 개인적으로 친절을 베풀고 때론 자신의 무지를 넘어서며 나를 좋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궁극적인 악의 정의(definitions)만으로는 살 수 없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닌 기본적인 존중과 인간적인 연민을 통째로 거부할 수는 없다. 내 마음은, 내가 지닌 사랑은 그들 하나하나를 단호히 부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