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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도서의 책소개, 저자소개, 발췌문

이완용 평전

 

이완용 평전 도서의 책소개를 할 텐데 우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게 비난할 수 있고 “난 너와는 달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이란, 반대급부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지속시켜 주는 존재일 수 있다. ‘매국노’ 이완용은 이런 측면에서 우리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제였는지도 모른다. 매국의 책임에 갇혀 있던 이완용이 그 자리에 놓이게 된 배후에는 그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엄혹한 현실과 맞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이완용의 선택이었다. 

 이완용 평전 도서의 책소개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 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 과거사 인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조명해 보려는 야심 찬 시리즈이다. 이 책은 그 첫걸음으로, 그간 '매국노'로 낙인찍혀 거의 실체를 조명받지 못했던 이완용의 평전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완용은 어린 시절 명문 반가의 양자로 들어가 고전을 익혔으며 과거 급제 후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주미대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되었던,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에 두루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각종 교육 개혁을 이끌고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며 정동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복잡다단했던 구한말 정계에서 주목받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과 함께 국망의 원인 제공자이자 인간적으로도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물론 그의 매국 행위는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이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 아래 일종의 탈출구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추적해 본 이완용은 기존의 평가처럼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인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전통적인 관료도 아니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김윤희 교수가 집필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이완용은 매국노, 친일파, 혹은 변신의 귀재 등으로 낙인찍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잠시 유보해 두고 그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명문 반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스물다섯에 과거에 급제한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은 영어 등 신문물을 가르쳤지만, 이 신식 학교의 입학생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주변 사람의 권유로 들어온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았다. 반면에 이완용은 전통 학문만으로는 시세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러한 식견은 당시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대단했던 고종의 의중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저자 김윤희 소개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근대 금융과 상업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상하이 푸단대학 역사학계 외국인 강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를 거쳐 현재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습니다.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조선의 최후』『통계로 본 근현대사』 등을 여러 사람과 함께 썼습니다. 자본주의와 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에 관심이 많으며,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최근작 : <이완용 평전>,<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1~8권 세트 - 전 8권>,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7> 이완용은 조선에서 맨 처음 주미공사를 파견했을 때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이라는 문명화된 사회를 목도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춰 나갔다. 귀국 후 제3차 갑오내각 때 학부대신으로 등용된 이완용은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인민 교육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의 관제도 개정되었다. 이완용은 왕이 부재하는 미국의 정치 체제를 일견하고 돌아왔으나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 같은 변화를 주장하는 급진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계가 혼란스러울 때 주도 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절대군주인 왕의 의중을 헤아려 자신의 행보를 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갑오내각 당시 그는 명문 반가 출신답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는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진작시킴으로써 조선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완용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개혁적 관료로 지목되는 인물이었다.

 발췌문

“그는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왕과 국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빚어질 때 이완용이 선택한 것은 어느 한쪽도 아니었다. 균열을 직시하고 그것을 파열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용기를 내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왕과 개인이 살아갈 현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 등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체제 변화를 향한 열정이 사라진 이후 현실의 삶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와 열정의 피로감을 덜기 위해 안정을 원했다. 개화와 개혁보다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력과 노동, 그리고 그것이 보장해 주리라 기대되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감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민주화 이후 개혁의 피로감이 실용주의에 인도되어 경제적 안정을 희구하는 분위기로 나아간 것처럼 이완용의 동양 문명화론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잡아끄는 자장의 하나였다. 이완용은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기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들에게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안정’을 주었다.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던 이완용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도 호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접기 이완용이 관직 생활에서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면서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가 지방관으로서의 설움을 느끼기도 했고, 비록 무죄로 판결 났지만 탐학의 죄를 쓰고 법부의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세를 관망하면서 재기를 기다릴 줄 알았고, 이완용의 뒤에는 그를 신임하는 고종이 있었다. 이완용의 행적을 논할 때 고종과의 관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통치자로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권력이 해체되는 것을 우려했던 고종은, 정치 개혁의 요구는 차단하되 경제적ㆍ사회적으로 근대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고, 이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를 견제하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조응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그는 국왕의 권력을 문제 삼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일본이 협상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손색없는 경력과 연륜을 갖추었기에 고종의 공식 라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의 친일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던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즈음부터 이완용은 조약 체결에 나선 을사5적과 함께 매국노로 호명되었다.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지향했던 입헌군주제를 위해 왕은 여전히 국민 통합의 구심으로 존재해야 했고, 덕분에 고종은 매국의 책임론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유생들 역시 절대적인 존재로 추상화된 왕에게 국망의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에, 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돌렸다. 이완용은 상소를 올려 이에 대응했다.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권리를 되찾을 수 있으며 을사조약이 한일의정서와 신협약의 결론에 불과하다는 그의 변명은 을사조약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발언이었다.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그의 논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유생들에게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완용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그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계몽운동 단체들과 유학파 지식인들은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을사조약의 문안에 근거해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나라를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완용의 주장은 그렇게 대한제국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 갔다.